← 인사이트로 돌아가기

계약서 검토 30분이 지켜낸 돈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은 8쪽짜리 영문 계약서에 2억 원이 걸려 있었습니다. 기계의 균등한 주의력 30분이 빠진 조항을 찾아냈고, 딜의 구조가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몇 달 전, AI 코칭을 진행하던 결제업계 대표님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오전, 대표님은 미국 프랜차이즈 투자 MOU에 서명한 상태였습니다. 금액은 원화로 2억 원.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게 가는 돈이었고, 송금은 며칠 안에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마감이 이미 한 번 밀린 터라, 그냥 보내버리자는 압박이 상당했죠.

관계로 만들어진 딜이었습니다. 그리고 관계로 만들어진 딜은 원래 검증을 받지 않습니다. 대표님도 그 돈을 절반쯤은 관계 비용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사업에 대한 투자이기도 하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라는 뜻이었죠. 계약서는 8쪽 남짓한 영문 문서였고, 상대방이 작성했고, 대표님은 꼼꼼히 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솔직히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비슷했을 겁니다. 여러 사업을 동시에 돌리는 사람이었고, 그날만 미팅이 세 개 더 있었고, 상대는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까요.

문서를 열기 전에 저는 간단한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송금하시기 전에 클로드한테 한 번만 돌려보시죠. 페이지를 사진 찍어서 올리면 15분, 길어야 30분입니다. 큰돈이잖아요. 보내기 전 30분은 공짜나 다름없습니다."

대표님은 동의했습니다. 뭔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계산이 너무 명확해서였습니다.

그날 세션에서 실제로 한 일

특별한 기술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계약서를 한 장씩 사진 찍고, 업로드하고, 텍스트를 추출한 다음, 구조화된 검토를 요청했습니다. 섹션별로 요약할 것, 빠진 것을 표시할 것,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항을 표시할 것, 일이 틀어졌을 때 각 조항이 투자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것.

첫 번째 이상 신호는 금방 나왔고, 민망할 만큼 단순했습니다. 3조가 없었습니다. 문서의 번호 체계는 3조를 참조하는데, 정작 본문에 그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대충 읽으면 눈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종류의 결함이죠. 하지만 모든 섹션을 빠짐없이 설명하라는 지시를 받은 기계는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조항을 하나씩 짚어갔는데, 갈수록 그림이 나빠졌습니다.

  • 수익 전체가 상장에 걸려 있었습니다. 계약은 상장과 연계된 지분을 약속하는데, 상장이 미뤄지거나 무산될 경우 돈을 돌려받을 조항이 없었습니다. 상환 조건도, 구제 수단도 없었죠.
  • 바이백 조항이 없었습니다. 회사도, 창업자 개인도 어떤 조건에서든 지분을 되사줄 의무가 없었습니다. 출구는 상장, 인수, 아니면 작은 비상장사 지분을 사줄 다른 매수자를 찾는 것뿐. 현실적으로는 출구가 없다는 뜻입니다.
  • 발행 주체가 미국 법인이었습니다. 분쟁이 생기면 한국 투자자가 미국 법원에서, 미국 법으로 다퉈야 합니다. 이 규모의 돈이라면 소송 비용이 회수액을 거의 다 먹어버립니다.
  • 회사에 기존 부채가 있었고, 그 사실은 지나가듯 한 줄로만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새로 들어가는 돈은 그 뒤에 서게 됩니다.
  • 밸류에이션이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매장 몇 개를 가진 회사인데, 계약서에 깔린 기업 가치는 그 매장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자릿수가 하나 어긋나 있었습니다.

조항별 디테일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쯤, 제가 한 줄로 정리해 드렸습니다. 이 계약서대로라면 회사는 상장할 의무가 없고, 돈을 돌려줄 의무도 없고, 일이 다 틀어지면 남는 선택지는 외국에서의 소송뿐입니다. 그 대가로 2억 원을 보내는 겁니다.

여기서 AI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정확히 구분하고 싶습니다. AI는 사기를 탐지한 게 아닙니다. 그저 8쪽째를 1쪽처럼 읽었을 뿐입니다. 사소하게 들리지만, 친구의 계약서를 그렇게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주의력이 그렇게까지 유지되지 않아서입니다. 관계가 옆에서 같이 읽으면서 조항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만들고, 중간쯤 가면 피로와 "설마 괜찮겠지"가 나머지를 대신 읽어 줍니다. 기계에는 그게 없었습니다. 번호만 있고 본문이 없는 조항을 알아챘고, "상장이 안 되면 투자자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계약서는 침묵한다"라고 답했습니다. 기계적인 관찰입니다. 그런데 그 관찰을 이 딜에 관련된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문서에 그런 종류의 균등한 주의력을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표님이 내린 결정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분석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온 결정의 속도였습니다.

그날 오전까지 그 계약서는 신뢰로 서명된, 사실상 읽히지 않은 종이 뭉치였습니다. 그날 오후, 같은 종이가 조항마다 주석이 달린 채로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고, 대표님은 그 자리에서 딜을 다시 짰습니다. 지분 투자는 접는다. 대신 같은 금액을 담보가 있는 대여로 바꾼다. 담보는 주식 질권, 개인 보증, 자산 담보, 개인 보증부 바이백 권리 중에서 상대방이 고르게 한다. 카운터 제안서도 같은 세션에서 함께 썼습니다. 자금 사용처에 대한 정보청구권, 재무제표 보증, 정해진 조건에서 지분 매각을 요구할 권리까지 세 가지를 추가로 요구하고, 상대가 전부 거부하면 딜에서 완전히 빠지기로 했습니다.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님은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은 그대로 두고, 자본의 형태만 바꿨습니다. "돈은 여전히 보내겠다, 다만 담보가 있는 대여로." 사람을 신뢰하는 것과 보호장치 없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구분하는 일. 사실 이 게임의 전부가 그 구분입니다.

카운터 제안서를 쓰던 중에 대표님이 반쯤은 저에게, 반쯤은 화면에 대고 말했습니다. "이거 진짜, 클로드만 보면 나 너무 감사해." 몇 분 뒤에는 감정의 나머지 절반이 나왔습니다. 신뢰로 시작한 딜에 이런 방어까지 해야 하느냐는 허탈함이었죠. 두 반응 모두 맞는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션을 마치며 제가 드린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안 만났으면, 그 돈은 그냥 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일에서 제가 가져가는 것

이 이야기를 실제보다 크게 부풀리고 싶지 않아서, 한계부터 분명히 적어 둡니다.

이 사례에서 AI는 변호사를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검토 결과는 대표님의 자문 변호사에게 넘어가 법적으로 유효한 2차 검토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요. AI의 계약서 검토는 1차 스크리닝이지, 법정에서 기댈 수 있는 의견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딜이 무너질 뻔한 지점이 바로 그 1차였습니다. 1차 검토 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않을 예정이었으니까요. 변호사에게 문의한 적이 없었고, 문서는 외국어였고, 상대는 친구였고, 마감은 코앞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액은 아프지만, 기관의 반사신경이 작동할 만큼 크지는 않았습니다. 100억짜리 딜이라면 자동으로 붙었을 검증 절차가 2억짜리 딜에는 붙지 않습니다. 돈이 사라지는 전형적인 프로필입니다.

시중에서 업무용 AI라고 팔리는 것 대부분은 공격입니다. 더 많이, 더 빠르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죠. 이 사례는 반대쪽 렌즈이고, 저는 이쪽이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어. 이미 가진 돈을 지켜 주는 AI. 쓸 만한 프레임은 "AI가 사기를 잡는다"가 아닙니다. 더 좁고, 더 오래가는 프레임은 이겁니다. AI는 8쪽째를 1쪽처럼 읽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읽지 않은 무언가에 서명하기 전에, 그 균등한 주의력을 이제 30분에, 거의 공짜로 살 수 있습니다. AI가 협상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상대방과의 관계도 모릅니다. 하지만 3조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알아챕니다. 어떤 날에는 그게 승부의 전부입니다.

그 뒤로 대표님 회사에는 상시 규칙이 하나 생겼습니다. 새로운 투자, 대여, 계약은 돈이 움직이기 전에 AI 검토를 거치고, 그다음에 변호사에게 간다. AI가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아무도 계약서를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